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켄 덴노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계 == 도다이지의 대불개안이 있기 전인 윤3월에, [[신라]]의 왕자를 자처한 한아찬(韓阿飡) 관등의 [[김태렴]](金泰廉)이라는 자와 공조사(貢調使) 김훤(金暄), 왕자를 모시는 김필언(金弼言) 등 700여 명의 신라인들이 7척의 배를 타고 와서 다자이후에 정박했다. 이들은 6월 14일에 수도로 들어와 신라 왕의 사명(使命)을 받들고 왔다고 알리면서 인사를 올리고 예물을 바쳤는데, >"하늘 아래 모든 땅이 천황의 땅이 아닌 것 없고, 하늘 아래 모든 백성이 천황의 백성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라며 절하는 김태렴 일행에게 흡족해진 일본 조정은 사흘 뒤인 17일에 조당(朝堂)으로 초청해 잔치를 열어주었다. 여기서 여제는 >"신라는 먼 옛날부터 대일본국에 조공을 바쳐 왔는데, 전왕인 승경(承慶, [[효성왕]]) 때 신라의 대부(大夫)인 김사공(金思恭) 등의 언행이 태만하여 예를 잃었으므로, 짐이 따로 사신을 보내 죄를 묻고자 하다가 지금 새로 신라왕이 된 헌영(軒英, [[경덕왕]])이 그 잘못을 알고 왕자를 보내어 예를 닦으니, 앞으로는 국왕이 친히 못 오겠거든 반드시 표문을 가지고 오도록 하라." 고 말했다. 김태렴 등은 6월 22일에 다이안지(大安寺)와 도다이지에 나아가 예불을 드리기도 했으며, 24일에는 나니와관(難波館)에 머물면서 사신을 보내 일본 조정에 예물과 술을 바쳤다. 이듬해인 753년에 여제는 오노노 다모리(小野田守)를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했지만, 경덕왕이 다모리를 만나주지도 않는 바람에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일본에 대한 신라의 태도, 신라의 대일본관(觀)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으로 꼽힌다'''. 고켄 덴노는 오랜만에 온 [[신라]] 사신을 이용하여 이들이 일본을 상국으로 섬기려 했다고 언플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으나 신라쪽에서 매몰차게 일본 사신을 거절함으로써 이런 언플에 차질이 생긴것이다. 김태렴 사건 직후부터 30년 가까운 오랜기간 신라에게 김태렴 사건을 들먹이며 신라와 외교적 분쟁을 야기한 것을 생각하면 일본쪽에서 얼마나 신라의 냉담한 태도에 이를 갈고 있었는지는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속일본기》에 따르면 일본 사신 오오토모노 고마로(大伴古麻呂)가 753년 정월에 [[당나라]] 조정에서 열린 조하식전에서 여러 나라의 사신들과 함께 [[현종(당)|당현종]]을 만났는데, 이때 고마로의 자리는 [[토번]] 사신과 함께 서반 제2석에 있었고, 신라 사신은 [[대식국]](아바스 칼리파조) 사신과 함께 동반의 제1석에 있었다. 고마로는 일본보다 상석에 신라가 위치한 것을 보고 신라는 예로부터 일본의 조공국이라며 시정을 요구했다. 이에 장군 오회실이 고마로의 눈치를 보며 신라 사신과 일본 사신의 자리를 서로 바꾸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속일본기》 이외에 중국과 한국의 사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해에 신라 사신은 조하식전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대식국과 토번은 입당하지도 않았다'''. 결국 '''고마로의 기사는 《속일본기》의 편찬자에 의하여 조작되어거나 윤색된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